2014년 4월 30일 수요일

제임스 샌더스, 토라와 정경, 성문서, 욥기

지금까지 샌더스가 밝힌 욥기의 관점(point of view)을 정리해 보자.

 

이 작업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간 헷갈렸던 ‘Yahwist source’(J)와 ‘Elohist source’(E) 의 애매한 관계를 조금 더 뚜렷하게 인지시켜 준다는 것에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개념은 ‘민족 — 개인’ 이다.

샌더스의 말에 의하면 욥기의 사상은 이스라엘의 전통이 바빌론 포로기 이전과 이 후 사이에 발생한 엄청난 격변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전통과 그 사상은 민족적, 국가적 차원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바빌론의 침략을 통해서 국가가 해체되고 민족이 해체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의 이 전통적 사상들이 개인에게는 잘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민족 — 개인’ 초점의 전향이 바로 욥기가 처한 상황이다. 이 초점의 전향은 우리들로 하여금 의문과 질문을 만들어 냈다. 이전의 전통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차원에서 이전 만큼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욥기의 해결과정은 과거 역사와 전통 안에서 민족과 그 운명을 함께 하셨던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감히 부를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으로 전향시키는 것을 통해서 드러났다.

 

이것은 초기 유대교 태생의 토대가 되었다. 유대교는 전역사적이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래서 그의 이름을 직접 야훼(J)라 부를 수 있었던 관계에서 이제는 초월적이시고 높으시어 더 이상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어 ‘주’(E)라 칭하게 되는 전환점을 제공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샌더스의 설명에서처럼 민족과 개인이라는 상호 양/질적 차이를 보이는 두 상반된 개념의 차이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을 통하여 각 입장에 해당하는 올바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욥기는 이 둘을 구분하였고, 계약신학이 자주 등장하는 전반부(3-31장)에서는 오직 엘로힘만을 언급하고, 반면 창조신학이 분명히 드러나는 후반부(38-41장)에서는 분명히 야훼라는 이름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 포로기 이사야(40-55장)는 하나님 이름의 이러한 도치를 거절하였고, 그는 오히려 창조주이며 역사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양상을 하나의 빛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샌더스의 설명 덕분에 우리는 초월적 하나님의 모습을 왜 ‘엘로힘’이라고 부르고 역사에 동참하시는 동행하는 친근한 하나님을 ‘야훼’라 부를 수 있게 되었는지 잘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