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신사도운동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학

2014년 요즘,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평가해보자면 우리는 과연 어느 축으로 더 기울어져 있을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가히 한국교회는 ‘경배와 찬양’이라는 ‘워십’(worship) 중심의 예배가 유행이 되었다. 이 워십이라는 요소를 위키백과가 지적하기를:

현대적 예배음악의 목적은 사람들과 온 교회가 개인의 경배 경험과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더욱 깊게 느끼는 데에 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세우고, 창조주에게 올리는 찬양과 경배를 도우며,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 감사하도록 돕는 것이 예배음악의 초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워십의 요소를 가장 힘있게 끌고 갔던 것은 1987년 하스데반 선교사가 시작한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워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개인’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의 이동을 단지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기인했다고 예상하기 쉽다. 사회가 점점 개인화 되어가고 있고, 그로 인해서 교회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를 넘어서서 그 이면의 원인으로까지 파고 들어간다면, 우리는 필히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또한 신학적인 관찰과 고찰을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Louis Berkhof’와 같은 관점을 빌려보자면, 신앙의 무게가 ‘대상’(object)으로부터 ‘주체’(subject)로 옮겨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바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1.21 - 1834.2.12)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지대한 영향을 통해 이루어진 인식의 이동은 실로 거대하다. 요약해서 서술하자면 신앙이 ‘대상’(말씀, 하나님, 교리 등)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더 큰 포인트가 실리게 된다. 즉 하나님의 권위보다 중요한 것은 그 권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나’라고 하는 주체(subject)이다.

이제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는 신앙관의 이해는 아마 개혁주의 교회의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 같다. 그들은 개인보다 먼저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온전히 계시되어 있는 ‘성경’을 더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개인’을 어떠한 도식에서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도운동, 빈야드, 성령주의적인 유행을 파악하는데 슐라이어마허를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움직임이 전적으로 슐라이어마허 때문이라는 단편적인 이해에 그치면 안 될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당대 ‘계몽주의’ 사상과 개신교 사상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서해석에 대한 이성적 이해의 극치를 달리던 시대의 학자로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로 돌아와 보자. 한국교회는 지금 워십중심, 구도자중심, 신사도운동적 예배에 치우쳐져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객관화된 사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이런 부분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편중된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이제 그것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개인에게로 옮겨졌다. 권위는 늘 말씀에 있는 터, 사실 우리에게는 그 권위가 없다. 권위의 출처는 항상 하나님이며, 그분의 말씀이지만 이러한 도식이 오해되고 과장되어서 ‘주체’가 강조되는 개인은 이제 마치 자신이 그 권위의 소유자인 것처럼 비약된 해석을 일삼게 된다.

또한 개인은 이러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영감’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자신의 뜨겁고 영적으로 충만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성령 해석이 필히 수반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고도로 발달된 이성적 이해의 상황 속에서 ‘균형’을 위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과 주체(subject)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대는 아마 이러한 균형적 이해를 간과한 채 고삐 풀린 모양으로 과도한 성령중심적, 주체의 이해와 감정중심, 텍스트를 간과한 채 일어나는 신앙고백의 상황으로 빠져버린 것 같다.





정이철 저작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도입부에 의하면 신사도 운동에 여지를 불어 넣은 것은 감리교의 창시자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와 미국 성결운동의 설교자 ‘찰스 펄햄’이다. 찰스 펄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감리교도인 나는 웨슬리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

아마 웨슬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회심이 아닐까. 소위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는 그의 고백에 있어서 위에서 서술한 슐라이어마허 이후의 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단편적인 서술은 감리교도인 나에게 있어서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나 역시 감리교에 빠져 그것만 알고 있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다른 한편의 마음이다. 어쨌든, 소위 ‘second blessing’이라고 하는 요소가 ‘Ralph D. Winter’와 같은 사람의 저작 ‘A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

18세기 웨슬리라고 한다면, 결국 15-16세기의 ‘마틴 루터’와 ‘장 칼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존’이라 함은 슐라이어마허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역사적 맥락이 늘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에서는 반대하겠지만, 나와 같은 사람처럼, 우리가 웨슬리의 후예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루터와 칼뱅의 교리-신학을 항상 저변에 깔고, 나의 가진 것을 살펴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루터-칼뱅’과의 접촉과 대화 없는 웨슬리는 과연 얼마나 공허할까.

결국 이 이야기의 서술은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마치 종교개혁 당시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본질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동시에 우리는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물려 받은 것이 참 많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문화가 바뀌면서 이것과 단절되어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신사도운동이나 빈야드, 오순절성령운동과 같은 현상도 이러한 단절 이후로 생기는 우리의 무관심과 방종의 결과물일 것이다. 교회에서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중심적인 설교를 위해 노력했다면 과연 지금의 모습과 같았을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물려 받은 것은 참 많다. 우선 구약과 신약. 성경이 있다. 초대교부의 저작들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집약된 교리집이 있다.

더불어 니체의 과격한 발언이나, 슐라이어마허의 저술 역시 역사적으로 그들의 반대편에 서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만 보면 그의 발언은 정말 과격하다. 슐라이어마허만 본다면 그의 서술은 이성 없는 공허한 감정의 세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균형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또 한편으로 알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세태는 기독교인 것 같으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상황은, 단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편향(inclination)은 어느 시대에나 일어난다. 다만 문제는 균형을 잡기 위해 다시 돌아오려는 능력, 즉 복원력을 잃어버린 데에서 나온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이룬 것은 ‘Re-Formed’이다. 이것은 단순히 재구성, 재형성적인 측면이 아니다. 오히려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물려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되새김을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이러한 얕은 수작의 현상들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해야할 일이 많다. 사회 전반적인 의식과 정신적 세계에 영향을 끼쳐야 할 판에, 아니 그래도 모자랄 판에, 미세한 변질과 기울어진 성향 때문에 생긴 작은 상처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 가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신학은 언제나 기반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는 가히 성령의 선물이다. 감리교도이지만, 나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외면할 수 없다. 이 짧은 글을 정리하면서 마음에 품는 것은, '하나님-역사'를 존중하고 그 권위 아래 나를 깨야겠다는 생각이다.

모든 발전과 극복, 균형은 자기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기비판의 첫걸음은 내가 물려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헤아리는 일로부터 시작하며, 두 번째 걸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실천된다.

기독교는 진지하게 텍스트(texts)를 회복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섣불리 자기 얘기를 떠벌리지 말고, 텍스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부터 해야할 것이다. 균형과 회복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