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영화] 거꾸로 된 파테마 (サカサマのパテマ, Patema Inverted, 2013)

소감

오랜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은 ‘거꾸로 된 파테마’

‘거꾸로’(inverted)라는 소재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이었어요.

발상도 재미있고, 표현력도 좋아서 꽤 볼만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네이버 관객평가는 9.0을 기록하고 있네요!

기억에 남는 장면

제가 생각했을 때 ‘거꾸로 된 파테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입장차이’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 에이지와 파테마는 서로 반대의 중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 둘의 시선과 관점은 서로 반대일 수밖에 없죠. 서로가 서로를 보며 ‘네가 반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상이고, 네가 거꾸로다."

이런 맥락으로 펼쳐지는 플롯이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조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서로 반대의 사람들이 이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주인공 ‘에이지’가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파테마’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는 부분입니다.


1. 첫 만남



에이지가 파테마를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낯선 땅에 도착한 파테마는 바닥이 없는 기괴한 세상에서 겁에 질려 있고, 에이지는 이러한 파테마를 바라보면서 단순한 호기심과 의아함을 가질 뿐입니다. 두 인물의 첫 만남에서 이러한 심리가 각각의 표정에서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2. 낯설음을 경험하다



이 장면은 위험에 빠진 파테마를 구하기 위해 에이지가 용기를 내어 구출하려는 장면입니다. 그 중 한 장면인데, 건물 옥상에서 약간의 몸싸움이 벌어진 가운데, 에이지는 아슬아슬하게 건물 끝에 걸려 까마득한 높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역시 주인공 표정을 참 잘 살린 것 같네요. 아마 이 경험이 에이지가 처음으로 겪게 되는 ‘높이’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합니다.


3. 반대 세상을 경험하다





중력이 서로 반대인 에이지와 파테마. 원래대로라면 남자인 에이지가 체중이 더 나가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갈 일이 없지만, 현재 파테마는 악당(?)들에게 붙잡혔을 때 걸린 족쇄가 다리에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이 족쇄 역시 파테마의 중력방향을 가진 물체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파테마가 더 무게가 많기 때문에 파테마가 에이지를 안고 하늘로 떨어지는(?) 중이지요.

뭐, 이대로 영화가 끝나버리려나 싶었는데(ㅋㅋ) 오르고 오르다보니 세상에. 하늘에 걸려 있는 또 하나의 도시가 등장합니다. 대체 세계관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건지;;;

아무튼 이 장면을 통해서 파테마는 똑바로 선 세상을 다시 보게 되고, 에이지는 난생 처음으로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경험하죠. 그리고 에이지는 애초에 파테마가 보였던 반응보다 더 무섭고 두려워하는 내면을 내비치게 됩니다. 드디어 에이지는 진정으로 파테마의 입장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이 장면을 통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와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을 말이죠. 상대방의 시각과 관점을 헤아리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4. 에이지의 고백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세계가 뒤집힌다는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누구나 경험하지 않고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겠죠.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결국 내 착각일 경우가 많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던 대목입니다.


나가는 말

영화 ‘거꾸로 된 파테마’를 통해서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극단적인 설정과 표현력이 그저 영화를 위한 소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때로는 매우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세상은 하나이고,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이념과 생각, 입장과 관점은 다 제각기 다르고 또 때로는 정반대여서 도저히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때가 있죠.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또한 ‘에이지’와 ‘파테마’가 서로 다른 중력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더욱이 서로 반대라는 것은 단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서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도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아직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게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이 항상 품고 나아가야 할 영원한 숙제라는 것만은 확실하겠죠.

“다른 건 틀린게 아니야"

‘다름’(different)은 항상 공통의 토대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공통된 토대로 삼을 만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더욱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그만큼의 타인에 대한 존중과 생명가치.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다는 공동된 토대 위에서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올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리뷰 끝)

2014년 12월 4일 목요일

'Philology'에 대해서

다음 문서의 출처는 'SBL'(Society and Biblical Literature)에서 발행하는 'Ancient Near East Monograph' 시리즈의 한 문서인 "Historical Linguistics and Biblical Hebrew"이다.


"Definitions of philology range across these varied notions: the intensive study of texts, especially old ones; the humanistic study of language and literature, considering both form and meaning in linguistic expression, combining linguistics and literary studies;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words; the systematic study of the development and history of languages; and the study of written records to determine their authenticity, original form, and meaning."


"One aim of philology is to get historical information from documents in order to learn about the culture and history of the people behind the text; another aim is to examine and interpret older written attestations with the goal of obtaining information about the history of the language (or languages) in which the documents are written."


각각 27쪽, 28쪽에서...


‘Philology’라는 이름 하에서 언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언어비교연구학을 통해서 이러한 열기는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영어나 독일어는 이미 충실히 이러한 작업에 도입되고 있는 실정인듯 하다.


한국어에 대한 연구도 이에 발을 맞출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한글에 대한 ‘etymology’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가 겨우 시도하고 있는 것은 한자를 통해서 찾거나 아니면 순수한글로 취급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말이 가지고 있는 ‘형태소’나 ‘음소’에 대한 접근과 비교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나무’는 왜 나무일까? ‘얼굴’은 왜 얼굴이라고 발음할까? ‘사람’은 왜 ‘사람’이라고 발음하는가?


한국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한자를 통하여서 그 뜻을 밝히는 데 한계 지어져 있다면, 우리는 현재 ‘Philology’라는 이름 하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서양학문에 크게 뒤쳐지는 불행을 낳게 될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어처럼 이렇게 훌륭하게 교착어 및 알타이어계 언어를 유지하고 활용하고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과 독특성을 가지고 조금 더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 연구 가치를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도리어 이러한 한국어의 독특성을 통하여서 지금은 죽은 언어(사어, 死語)인 고대근동어에 대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모국어들은 독특하고 고귀하다. EBS 다큐프라임이 2013년 12월 3일에 방영한 ‘한국인과 영어, 제5부 두 언어의 미래’ 편을 보면 프랑스어 장려기관 국장인 ‘에그 자비에’의 인터뷰에서 아주 인상 깊은 내용이 나온다. 그는 말하기를 


“단 하나의 언어가 전 세계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매우 정확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세계가 단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면 그 세계는 매우 고독한 세계일 것’이라는 것이죠. 왜일까요? 우리는 항상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주도권히 가히 서양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언어에 대한 주도권과 우월성 역시 서양권 언어에게 양도해버린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본다.


한국어의 태생적인 소중함을 다시 기억해서라도, 대세를 따르되 우리말이 가진 위대함을 늘 견지하면서 학문을 해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