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영화] 거꾸로 된 파테마 (サカサマのパテマ, Patema Inverted, 2013)

소감

오랜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은 ‘거꾸로 된 파테마’

‘거꾸로’(inverted)라는 소재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이었어요.

발상도 재미있고, 표현력도 좋아서 꽤 볼만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네이버 관객평가는 9.0을 기록하고 있네요!

기억에 남는 장면

제가 생각했을 때 ‘거꾸로 된 파테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입장차이’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 에이지와 파테마는 서로 반대의 중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 둘의 시선과 관점은 서로 반대일 수밖에 없죠. 서로가 서로를 보며 ‘네가 반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상이고, 네가 거꾸로다."

이런 맥락으로 펼쳐지는 플롯이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조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서로 반대의 사람들이 이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주인공 ‘에이지’가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파테마’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는 부분입니다.


1. 첫 만남



에이지가 파테마를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낯선 땅에 도착한 파테마는 바닥이 없는 기괴한 세상에서 겁에 질려 있고, 에이지는 이러한 파테마를 바라보면서 단순한 호기심과 의아함을 가질 뿐입니다. 두 인물의 첫 만남에서 이러한 심리가 각각의 표정에서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2. 낯설음을 경험하다



이 장면은 위험에 빠진 파테마를 구하기 위해 에이지가 용기를 내어 구출하려는 장면입니다. 그 중 한 장면인데, 건물 옥상에서 약간의 몸싸움이 벌어진 가운데, 에이지는 아슬아슬하게 건물 끝에 걸려 까마득한 높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역시 주인공 표정을 참 잘 살린 것 같네요. 아마 이 경험이 에이지가 처음으로 겪게 되는 ‘높이’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합니다.


3. 반대 세상을 경험하다





중력이 서로 반대인 에이지와 파테마. 원래대로라면 남자인 에이지가 체중이 더 나가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갈 일이 없지만, 현재 파테마는 악당(?)들에게 붙잡혔을 때 걸린 족쇄가 다리에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이 족쇄 역시 파테마의 중력방향을 가진 물체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파테마가 더 무게가 많기 때문에 파테마가 에이지를 안고 하늘로 떨어지는(?) 중이지요.

뭐, 이대로 영화가 끝나버리려나 싶었는데(ㅋㅋ) 오르고 오르다보니 세상에. 하늘에 걸려 있는 또 하나의 도시가 등장합니다. 대체 세계관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건지;;;

아무튼 이 장면을 통해서 파테마는 똑바로 선 세상을 다시 보게 되고, 에이지는 난생 처음으로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경험하죠. 그리고 에이지는 애초에 파테마가 보였던 반응보다 더 무섭고 두려워하는 내면을 내비치게 됩니다. 드디어 에이지는 진정으로 파테마의 입장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이 장면을 통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와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을 말이죠. 상대방의 시각과 관점을 헤아리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4. 에이지의 고백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세계가 뒤집힌다는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누구나 경험하지 않고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겠죠.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결국 내 착각일 경우가 많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던 대목입니다.


나가는 말

영화 ‘거꾸로 된 파테마’를 통해서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극단적인 설정과 표현력이 그저 영화를 위한 소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때로는 매우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세상은 하나이고,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이념과 생각, 입장과 관점은 다 제각기 다르고 또 때로는 정반대여서 도저히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때가 있죠.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또한 ‘에이지’와 ‘파테마’가 서로 다른 중력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더욱이 서로 반대라는 것은 단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서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도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아직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게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이 항상 품고 나아가야 할 영원한 숙제라는 것만은 확실하겠죠.

“다른 건 틀린게 아니야"

‘다름’(different)은 항상 공통의 토대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공통된 토대로 삼을 만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더욱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그만큼의 타인에 대한 존중과 생명가치.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다는 공동된 토대 위에서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올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리뷰 끝)

2014년 12월 4일 목요일

'Philology'에 대해서

다음 문서의 출처는 'SBL'(Society and Biblical Literature)에서 발행하는 'Ancient Near East Monograph' 시리즈의 한 문서인 "Historical Linguistics and Biblical Hebrew"이다.


"Definitions of philology range across these varied notions: the intensive study of texts, especially old ones; the humanistic study of language and literature, considering both form and meaning in linguistic expression, combining linguistics and literary studies;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words; the systematic study of the development and history of languages; and the study of written records to determine their authenticity, original form, and meaning."


"One aim of philology is to get historical information from documents in order to learn about the culture and history of the people behind the text; another aim is to examine and interpret older written attestations with the goal of obtaining information about the history of the language (or languages) in which the documents are written."


각각 27쪽, 28쪽에서...


‘Philology’라는 이름 하에서 언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언어비교연구학을 통해서 이러한 열기는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영어나 독일어는 이미 충실히 이러한 작업에 도입되고 있는 실정인듯 하다.


한국어에 대한 연구도 이에 발을 맞출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한글에 대한 ‘etymology’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가 겨우 시도하고 있는 것은 한자를 통해서 찾거나 아니면 순수한글로 취급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말이 가지고 있는 ‘형태소’나 ‘음소’에 대한 접근과 비교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나무’는 왜 나무일까? ‘얼굴’은 왜 얼굴이라고 발음할까? ‘사람’은 왜 ‘사람’이라고 발음하는가?


한국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한자를 통하여서 그 뜻을 밝히는 데 한계 지어져 있다면, 우리는 현재 ‘Philology’라는 이름 하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서양학문에 크게 뒤쳐지는 불행을 낳게 될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어처럼 이렇게 훌륭하게 교착어 및 알타이어계 언어를 유지하고 활용하고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과 독특성을 가지고 조금 더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 연구 가치를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도리어 이러한 한국어의 독특성을 통하여서 지금은 죽은 언어(사어, 死語)인 고대근동어에 대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모국어들은 독특하고 고귀하다. EBS 다큐프라임이 2013년 12월 3일에 방영한 ‘한국인과 영어, 제5부 두 언어의 미래’ 편을 보면 프랑스어 장려기관 국장인 ‘에그 자비에’의 인터뷰에서 아주 인상 깊은 내용이 나온다. 그는 말하기를 


“단 하나의 언어가 전 세계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매우 정확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세계가 단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면 그 세계는 매우 고독한 세계일 것’이라는 것이죠. 왜일까요? 우리는 항상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주도권히 가히 서양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언어에 대한 주도권과 우월성 역시 서양권 언어에게 양도해버린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본다.


한국어의 태생적인 소중함을 다시 기억해서라도, 대세를 따르되 우리말이 가진 위대함을 늘 견지하면서 학문을 해야하겠다.

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신사도운동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학

2014년 요즘,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평가해보자면 우리는 과연 어느 축으로 더 기울어져 있을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가히 한국교회는 ‘경배와 찬양’이라는 ‘워십’(worship) 중심의 예배가 유행이 되었다. 이 워십이라는 요소를 위키백과가 지적하기를:

현대적 예배음악의 목적은 사람들과 온 교회가 개인의 경배 경험과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더욱 깊게 느끼는 데에 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세우고, 창조주에게 올리는 찬양과 경배를 도우며,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 감사하도록 돕는 것이 예배음악의 초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워십의 요소를 가장 힘있게 끌고 갔던 것은 1987년 하스데반 선교사가 시작한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워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개인’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의 이동을 단지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기인했다고 예상하기 쉽다. 사회가 점점 개인화 되어가고 있고, 그로 인해서 교회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를 넘어서서 그 이면의 원인으로까지 파고 들어간다면, 우리는 필히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또한 신학적인 관찰과 고찰을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Louis Berkhof’와 같은 관점을 빌려보자면, 신앙의 무게가 ‘대상’(object)으로부터 ‘주체’(subject)로 옮겨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바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1.21 - 1834.2.12)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지대한 영향을 통해 이루어진 인식의 이동은 실로 거대하다. 요약해서 서술하자면 신앙이 ‘대상’(말씀, 하나님, 교리 등)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더 큰 포인트가 실리게 된다. 즉 하나님의 권위보다 중요한 것은 그 권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나’라고 하는 주체(subject)이다.

이제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는 신앙관의 이해는 아마 개혁주의 교회의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 같다. 그들은 개인보다 먼저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온전히 계시되어 있는 ‘성경’을 더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개인’을 어떠한 도식에서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도운동, 빈야드, 성령주의적인 유행을 파악하는데 슐라이어마허를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움직임이 전적으로 슐라이어마허 때문이라는 단편적인 이해에 그치면 안 될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당대 ‘계몽주의’ 사상과 개신교 사상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서해석에 대한 이성적 이해의 극치를 달리던 시대의 학자로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로 돌아와 보자. 한국교회는 지금 워십중심, 구도자중심, 신사도운동적 예배에 치우쳐져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객관화된 사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이런 부분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편중된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이제 그것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개인에게로 옮겨졌다. 권위는 늘 말씀에 있는 터, 사실 우리에게는 그 권위가 없다. 권위의 출처는 항상 하나님이며, 그분의 말씀이지만 이러한 도식이 오해되고 과장되어서 ‘주체’가 강조되는 개인은 이제 마치 자신이 그 권위의 소유자인 것처럼 비약된 해석을 일삼게 된다.

또한 개인은 이러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영감’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자신의 뜨겁고 영적으로 충만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성령 해석이 필히 수반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고도로 발달된 이성적 이해의 상황 속에서 ‘균형’을 위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과 주체(subject)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대는 아마 이러한 균형적 이해를 간과한 채 고삐 풀린 모양으로 과도한 성령중심적, 주체의 이해와 감정중심, 텍스트를 간과한 채 일어나는 신앙고백의 상황으로 빠져버린 것 같다.





정이철 저작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도입부에 의하면 신사도 운동에 여지를 불어 넣은 것은 감리교의 창시자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와 미국 성결운동의 설교자 ‘찰스 펄햄’이다. 찰스 펄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감리교도인 나는 웨슬리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

아마 웨슬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회심이 아닐까. 소위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는 그의 고백에 있어서 위에서 서술한 슐라이어마허 이후의 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단편적인 서술은 감리교도인 나에게 있어서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나 역시 감리교에 빠져 그것만 알고 있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다른 한편의 마음이다. 어쨌든, 소위 ‘second blessing’이라고 하는 요소가 ‘Ralph D. Winter’와 같은 사람의 저작 ‘A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

18세기 웨슬리라고 한다면, 결국 15-16세기의 ‘마틴 루터’와 ‘장 칼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존’이라 함은 슐라이어마허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역사적 맥락이 늘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에서는 반대하겠지만, 나와 같은 사람처럼, 우리가 웨슬리의 후예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루터와 칼뱅의 교리-신학을 항상 저변에 깔고, 나의 가진 것을 살펴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루터-칼뱅’과의 접촉과 대화 없는 웨슬리는 과연 얼마나 공허할까.

결국 이 이야기의 서술은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마치 종교개혁 당시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본질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동시에 우리는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물려 받은 것이 참 많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문화가 바뀌면서 이것과 단절되어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신사도운동이나 빈야드, 오순절성령운동과 같은 현상도 이러한 단절 이후로 생기는 우리의 무관심과 방종의 결과물일 것이다. 교회에서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중심적인 설교를 위해 노력했다면 과연 지금의 모습과 같았을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물려 받은 것은 참 많다. 우선 구약과 신약. 성경이 있다. 초대교부의 저작들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집약된 교리집이 있다.

더불어 니체의 과격한 발언이나, 슐라이어마허의 저술 역시 역사적으로 그들의 반대편에 서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만 보면 그의 발언은 정말 과격하다. 슐라이어마허만 본다면 그의 서술은 이성 없는 공허한 감정의 세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균형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또 한편으로 알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세태는 기독교인 것 같으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상황은, 단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편향(inclination)은 어느 시대에나 일어난다. 다만 문제는 균형을 잡기 위해 다시 돌아오려는 능력, 즉 복원력을 잃어버린 데에서 나온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이룬 것은 ‘Re-Formed’이다. 이것은 단순히 재구성, 재형성적인 측면이 아니다. 오히려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물려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되새김을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이러한 얕은 수작의 현상들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해야할 일이 많다. 사회 전반적인 의식과 정신적 세계에 영향을 끼쳐야 할 판에, 아니 그래도 모자랄 판에, 미세한 변질과 기울어진 성향 때문에 생긴 작은 상처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 가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신학은 언제나 기반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는 가히 성령의 선물이다. 감리교도이지만, 나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외면할 수 없다. 이 짧은 글을 정리하면서 마음에 품는 것은, '하나님-역사'를 존중하고 그 권위 아래 나를 깨야겠다는 생각이다.

모든 발전과 극복, 균형은 자기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기비판의 첫걸음은 내가 물려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헤아리는 일로부터 시작하며, 두 번째 걸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실천된다.

기독교는 진지하게 텍스트(texts)를 회복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섣불리 자기 얘기를 떠벌리지 말고, 텍스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부터 해야할 것이다. 균형과 회복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2014년 4월 30일 수요일

제임스 샌더스, 토라와 정경, 성문서, 욥기

지금까지 샌더스가 밝힌 욥기의 관점(point of view)을 정리해 보자.

 

이 작업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간 헷갈렸던 ‘Yahwist source’(J)와 ‘Elohist source’(E) 의 애매한 관계를 조금 더 뚜렷하게 인지시켜 준다는 것에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개념은 ‘민족 — 개인’ 이다.

샌더스의 말에 의하면 욥기의 사상은 이스라엘의 전통이 바빌론 포로기 이전과 이 후 사이에 발생한 엄청난 격변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전통과 그 사상은 민족적, 국가적 차원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바빌론의 침략을 통해서 국가가 해체되고 민족이 해체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의 이 전통적 사상들이 개인에게는 잘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민족 — 개인’ 초점의 전향이 바로 욥기가 처한 상황이다. 이 초점의 전향은 우리들로 하여금 의문과 질문을 만들어 냈다. 이전의 전통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차원에서 이전 만큼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욥기의 해결과정은 과거 역사와 전통 안에서 민족과 그 운명을 함께 하셨던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감히 부를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으로 전향시키는 것을 통해서 드러났다.

 

이것은 초기 유대교 태생의 토대가 되었다. 유대교는 전역사적이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래서 그의 이름을 직접 야훼(J)라 부를 수 있었던 관계에서 이제는 초월적이시고 높으시어 더 이상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어 ‘주’(E)라 칭하게 되는 전환점을 제공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샌더스의 설명에서처럼 민족과 개인이라는 상호 양/질적 차이를 보이는 두 상반된 개념의 차이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을 통하여 각 입장에 해당하는 올바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욥기는 이 둘을 구분하였고, 계약신학이 자주 등장하는 전반부(3-31장)에서는 오직 엘로힘만을 언급하고, 반면 창조신학이 분명히 드러나는 후반부(38-41장)에서는 분명히 야훼라는 이름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 포로기 이사야(40-55장)는 하나님 이름의 이러한 도치를 거절하였고, 그는 오히려 창조주이며 역사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양상을 하나의 빛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샌더스의 설명 덕분에 우리는 초월적 하나님의 모습을 왜 ‘엘로힘’이라고 부르고 역사에 동참하시는 동행하는 친근한 하나님을 ‘야훼’라 부를 수 있게 되었는지 잘 이해하게 된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신학]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is

2014년 1월 17일 아람연구원 금요반

* text
Idem ergo Spiritus, qui per os Prophetarum loquutus est, in corda nostra penetret necesse est, ut persuadeat fideliter protulisse quod divinitus erat mandatum.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vol. 1 (Berolini: Gustavum Eichler, 1834), 60.

* translate in English
Thence therefore the spirit who though them has been talked by prophets is necessary to penetrate our chord.

특히나 to penetrate our chord 라는 번역이 인상에 남는다. 'chord'라는 표현은 원래 'heart'로도 번역할 수 있었는데 굳이 'chord'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 부분을 한국말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심금을 울린다" 라는 표현으로 의역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었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신앙] "οἰκοδομέω"의 체험

내 나이 28

2014년을 시작하는 1월 11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도중에

난생 처음으로 "οἰκοδομέω"(to build)를 깨닫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짓는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다른 성전을 '짓겠다'하셨다.

주께서는 또한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 지어지고 있다는 것(something has been building on my heart)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경이롭고 신비로운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 새로운 성전이 지어지고, 성령께서 이 안에 거주함을 통해서 이것들이 움직일 동력을 얻는다.

이 생생하고 놀라운 경험을 무어라 찬송할까...

2014년 1월 9일 목요일

[신학] <기사 링크> 해석학자 앤서니 티슬턴 (Anthony C. Thiselton)

 

기사 링크 바로가기 (클릭, 새 창)

앤서니 티슬턴에 대한 뉴스가 있어서 링크한다. 그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과 설명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티슬턴은 21세기 신학의 최신 경향을 함께 하고 있는 신학자로써 그에 대한 설명을 한 번쯤 읽고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