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7일 화요일

[묵상] 2014년 1월 8일 인우학사 새벽예배

<본문>
- 빌립보서 4:8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목사님께서는 어제 있었던 박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 중에서 "통일은 대박이다" 라고 언급했던 박대통령의 원론적인 발언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비판의 요점은 즉 이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정부의 행보는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만민의 통념을 계승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것을 고민해 왔다. 그런데 박대통령의 저러한 발언은 지금까지 정부가 이어오던 이러한 모든 노력들을 송두리째 무시한 채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것은 조금 더 먼 시야를 통해 현실에 해야할 것들을 결정했던 기존의 방식이 무너지고 다시 당장 눈앞의 것들만 살피고 그것들에 만족하게 하는 근시안적 태도였다는 것이 비판의 중심이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을 통해 강권하였던 것처럼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명예스러운 것, 덕이 되는 것, 칭찬할 만한 것' 등 "숭고한 것들"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추권하셨다.


말씀은 여기까지였지만, 구태여 여기에 오늘 예배에 대한 것을 기록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숭고한 것"이란 무엇일까?

반대로 '숭고한 것'의 반대말은, 설교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았을 때, 바로 '근시안적 태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결국 '숭고한 것'이란 '혜안'(慧眼)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혜안'(慧眼)을 가지려면 인간은 누구라도 가장 먼저 '물려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헤아려야 한다.

바울 역시 우리에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고전 4:7) 라고 우리를 촉구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힘을 주고(전 3:11),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새번역의 지적처럼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눈 앞의 것을 헤아리는 존재가 아니라 숭고한 뜻, 곧 혜안을 가지고 영원을 헤아리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오늘의 묵상을 통해 신앙은 역사(Geschichte)로의 동참이 아닐까 생각했던 이전의 글을 더 환기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새해를 시작하는 달이다. 더욱이 이런 말씀을 묵상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된다.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전의 것과 단절된 사람은 결국 덧없는 원론과 순간의 판단만으로 살아 가는 깨진 존재가 될 것이다. 역사적인 감각은 나의 존재 자체와 또한 모든 일에 대한 감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나는 어디서부터,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이어져오는 존재인가?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 지어진 사람이라는(분명한 진리지만, 이것 역시 너무 원론적이지 않은가?) 원론 말고, 나만의 "고백"이 있을 수 있어야 하겠다.

존재가 숭고해질 수 있으려면 존재는 모든 관계로부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로부터 이해되기 시작하는 자신의 존재 의식. 이것이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탈피하고 오늘날 나의 친구와 지인들, 직장의 동료들, 교회의 공동체들, 육신의 가족들 등 모든 이웃들을 돌아보며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사정에 따라 함께 웃고 울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상식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것을 바라보는 삶, 영원을 사모하는 삶,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삶, "Geschichte"로의 동참하는 삶, 신앙을 토대로 사는 그러한 인간의 삶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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